[김병후*정신과전문의]
우리는 원치 않게 화나는 일이 많은데, 크게 두 가지 유형의 분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화 과정에서 사랑이 있기 전에 분노가 있고요. 그다음에 사랑이 있은 다음의 분노가 있어요. 이 두 가지의 분노는 아주 다릅니다.
1. 사랑이 있기 전 분노
새끼를 기르는 동물 이전의 동물(파충류, 어류 등)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열대어는 새끼 낳고 좀 지나서 자기 새끼를 다 잡아 먹으니까요. 이때의 분노는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어요. 둘 중의 하나예요. 다른 생물을 잡아먹거나 아니면 먹히지 않기 위해서 방어하거나. 이 파괴적인 분노가 나쁠 것 같지만 그 동물들한테는 그게 없으면 하루 살아갈 수가 없어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은 매일매일 다른 생명을 죽이고 먹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단, 우리는 직접 사냥을 하지 않고 사냥하는 걸 우리가 먹으니까 되게 우아한 것 같죠. 삼겹살을 구워 먹고, 고기를 구워 먹고 멸치를 먹고. 하지만 동물일 경우 그걸 본인은 직접 해야 해요. 그 생명을 앗아야만 자기나 새끼가 살 수 있어서 이때 동물들의 분노라는 본능은 매일매일 살아가기 위해서 작동되는 분노고 그 정체는 파괴입니다.
2. 사랑이 있은 후 분노
그다음에 사랑이 만들어진 다음에 분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부모 자식 관계는 잡아 먹히고 잡아먹는 그 관계가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하는 관계예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거든요.
하루에도 몇 번씩 부모와 자식 간의 분노가 많을 거예요. 이 분노가 파괴를 위한 분노일까요? 따로 기능이 있습니다. 관계에서의 불공정을 받지 않기 위한 분노입니다. 만약 부부 사이에 내 마음을 상하게 했으면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문제이니까 교정하라는 의미에서의 분노라는 거예요.
인간한테는 파괴적인 분노는 전쟁 등 아주 적게 일부분 있죠. 나머지는 관계에서의 분노입니다. 그런데 정치권이든 부부싸움, 부모-자식 간의 싸움 등 굉장히 파괴적인 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분노의 원래 목적은 불완전한 교류를 보정하기 위한 건데, 분노의 속성 자체가 파괴적인 것이 있어서 씩씩대고 폭력을 쓰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족에게 화나는 건 가족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뭐가 잘못돼 있는 것, 내가 가족한테 불공정하게 했든 내가 마음이 상했든 그것을 서로 알리고 알려주고 교정하기 위한 건데, 우린 이걸 갖다가 파괴적인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복수하려고 하죠.
그러면 성장 과정에서 어떻게 분노가 만들어질까요? 갓난아기의 분노가 제일 원초적일 거예요. 갓난아이가 언제 분노를 내느냐. 갓난아기 손을 꽉 잡아서 아이를 꼼짝 못 하게 하면 처음엔 가만히 있다가 잠시 후 말도 못 하게 용을 쓰는 것이 전형적인 분노의 표정이거든요. 이게 뭐냐면 동물들이 덫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할 때 내는 분노예요. 이게 인간의 분노 중에서 제일 원천적인 분노예요.
그다음 아이들이 조금 성장해서 뭘 하려고 할 때 어른들이 하지 못하게 제지하면 화를 내요. 4~5살짜리 꼬마가 자기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는데 부모가 먼저 누르면 막 난리를 칩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걸 누가 가로막을 때도 분노가 나와요.
또 부모가 없을 때 큰 애가 작은 애를 몰래 꼬집거나 때리는 형태의 분노가 있어요. 형제자매간 질투에 대한 겁니다. 형제간에 부모가 나한테 공정하게 대했느냐, 대하지 않았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 오빠는 밤늦게 들어와도 괜찮고 나는 뭐라고 그러냐. 왜 오빠는 설거지 안 시키고 나만 시키느냐.’ 반대로 ‘왜 동생한테 용돈 더 주고 나는 안 줬어.’ 바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공정’에 대한 이슈가 나오게 됩니다. 불공정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죠.
이제 사춘기가 되면 그때는 자기 나름대로 독창적으로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갖고 있는데, 또 그것이 미숙하니까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게 되면 아이들이 반항하게 되죠. 이게 사춘기의 반항입니다. 자율적인 삶에 대한 것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분노도 말할 수 없이 커집니다.
연인 사이에는 아주 새로운 분노 형태가 나옵니다. 이때는 사랑이 관여되면서 서로가 행동 제한이 돼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연인 간의 약속이 되거든요. 그래서 한쪽에서는 행동 제한을 한다고 싫어하고, 한쪽에서는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현상이 있어요.
‘우리가 연인이 된다'라고 하면 두 사람 마음속에 [상대가 나한테 어떻게 해야 하고 나는 상대한테 어떤 권리가 있다라는 것]을 가져요. 그런데 이거를 하나하나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연인 관계가 성립되면 생일 선물을 해줘야 하고, 상대 부모님을 만날 때 예의를 갖춰야 하는 등의 여러가지 것들이 있어요. 자기 머릿속에 있는데 상대는 몰라요. 그래서 여기서 오는 서로의 갈등에서 오는 분노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행동 제한 같은 경우는 분노의 형태가 대단히 크거든요. 갓난아기의 손을 꽉 잡는 것도 행동 제한인데, 이런 형태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행동 제한을 느껴요.
예를 들어서 남편이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부인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당신 그 남자 친구 중에 한 사람 바람피우는 사람이고 안 좋은 사람이 만나지 마. 아무리 친한 사람이나 싫어” 이러는 것이나 “이번 일요일 날은 나가면 안 돼.” 이런 말 같은 것이죠.
부인이 얘기할 때는 남편이 뭘 잘못할 것 같으니까 얘기하지만, 남편이 받아들일 때는 나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성인인 나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지?’ 이러면서 분노가 크게 나올 수 있는데 부부 사이는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어요. 청소년인 아이가 게임을 너무 많이 하니까 엄마가 화가 나서 가위로 전선을 잘랐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엄마 배를 발로 찼어요. 아이는 부모가 본인의 행동을 강압적으로 제한했다고 느끼면서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온 거예요.
자신에게 나오는 분노,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오는 분노
분노는 원래 상대한테 나오는 건데 자기한테 나오는 분노 형태가 있어요. 본인이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자기를 얼마나 자책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집을 구매했는데 계약서의 집에 하자 있는 것을 잘 보지 않고 본인이 작성했어요. 그럼 자기를 정말로 심하게 자책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해’ 하면서 얘기를 하는데 이것도 되게 가혹해요.
그런데 이 분노가 자기한테만 향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나와요. 내 자식이거나 아내거나. 자녀의 시험 보기 전날인데 부모가 자지 말고 공부하라고 얘기했더니 “아, 괜찮아. 자고 일어나서 머리 맑은 상태에서 공부할게.”라고 대답했는데 아주 중요한 시험을 망쳤어요. 그래서 시험에 떨어지거나 좋은 대학을 못 가게 됐다고 쳐요. 다음날 그 상황을 알게 된 부모가 자식을 심하게 혼을 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너는 내 아들도 아니야.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너 그런 식으로 하면 살 수 없어.” 이렇게 부모가 아주 심한 저주의 말을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자신한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자식한테 하는 거예요.
부모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자녀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이게 얼마나 자녀를 힘들게 하는지를 몰라요. 자녀로서는 자기가 세상에 제일 힘든데 부모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나는 더는 살 가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충돌하게 됩니다. 자녀의 행동이 뭔가 효율적이지 않거나 잘못됐을 때 자식이 아픔에 대한 것을 잘 몰라요.
‘불통’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는 것에서 오는 분노가 아주 많아요. 나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데 상대가 관계를 거절한다거나, 이야기하는데 아예 듣질 않는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엄청나게 큰 분노가 와요. 그래서 부인들이 얘기할 때 “당신 왜 내 말을 듣지 않아” 뭐 이런 얘기 같은 것들.
그럼 분노를 어떻게 다스릴까요.
분노는 분노가 만들어지는 과정, 분노가 처음에 들어오고 생성되고 축적되고 그다음에 발현되는 그때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분노가 나오는 과정에서 통제력을 잃을 때가 있어요. 이럴 때는 정말 폭발적인 분노가 나오는 거거든요. 이 경우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 부부간에는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그럴 수도 있지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공감하지 않으려고 할 때도 큰 상처가 나오게 됩니다. 그다음에 제일 많이 있는 형태는 분노가 있는 것들을 해결하지 않고 쌓아놓고 있다가 한꺼번에 팡 터질 때입니다. 이럴 때는 문제가 되는 분노가 터지게 되는 거예요. 조절되지 않고 터지는 분노인 경우가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원인에 대한 걸 잘 몰라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자신도 잘 모르면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우선 본인의 분노를 자기가 알아야 합니다. 이미 빵빵 터질 때의 분노는 우리가 조절할 수 없습니다. 분노를 내가 다룰 수 있을 때의 분노는 초기일 거예요. 초기인 경우에는 분노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고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때 분노의 원인을 스스로 깨닫고 분노의 대상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수월하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분노가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내 분노를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즉 “아, 난 이래서 화가 나.” 상대가 “어, 화가 날 만한데.” 이게 객관성이에요.
상대의 분노에 대해서는 내가 객관성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나는 상대의 분노를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의 감정은 겉에 나타나는 것은 정서라고 하는데, 우리는 상대가 나타내는 분노만 알 수 있지 내면에 있는 분노를 알 수 없어요. 상대의 분노는 주관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 못하더라도 상대가 분노에 관해 설명해주는 것을 객관성이 있다라는 걸 찾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는 분노가 서로 조절이 됩니다. 부부 상담할 때 보면 서로 상대의 분노에 대한 걸 알고 말이 통하면요 해결 방안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두 사람은 정말 예전보다 훨씬 깊은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게 돼요.
사랑이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면 분노는 그 관계가 이상이 있을 때 잘못된 관계를 교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찾게 되면 깨진 관계가 복원되잖아요. 그럼 처음에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만큼이나 엄청난 행복이 오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분노라는 건 결국 우리를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용한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를 잘하도록 하고 좋은 사회로 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죠. 긍정적으로 분노를 활용하게 되면 이 사회가 굉장히 안전하고 좋은 사회가 되고 주변 사람과 행복한 교류를 하는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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