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인 * 응급의학과 전문의]
기운 없이 누워 계시는 뼈만 앙상한 90세 노인에게 입원할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제 가운 자락을 꽉 잡고는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왜 나한테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거예요?”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데요, 다른 병원에서 이송된 이 노인의 상태에 대해 당사자는 모른 채 보호자에게만 설명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노인을 치료의 대상으로 여길 뿐 뭐가 필요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현장에서 계속 일하다 보니 나이 드신 분들이 죽음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경우가 많아서 노인준비생인 우리 모두 젊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응급실에서 보는 환자들은 죽음에 대비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응급현장에 간혹 환자나 보호자가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가지고 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사전연명의료 의향서가 법제화되고, 이것을 쓰는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되어 응급상황이 오면 사전연명 치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발전입니다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문제가 많습니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에는 대단히 많은 동의 항목이 있습니다. “법령의 설명 잘 들었으니 사인하시오” 그래서 사인을 하는데요, 막상 법적인 효력을 만들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연명 치료를 하시겠습니까?” 에 대한 것은 모호하고 광범위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의사 역시 연명의료 의향서를 받게 되면 치료의 방향 설정은 되지만 구체적이지 않아 “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 라는 어려움을 느끼죠.
다양한 의학적 상황과 그에 따른 처치들, 가령 중환자실 치료, 삽관, 비위관, 튜브, 항암제, 투석기, 체외 순환기 등의 처치에 관해 “이것들을 전부 다 안 한다는 거야? 혹은 하나 두 개 안 한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연명의료 의향서를 썼더라도 현장에서 세부항목을 선택해야 해요.
그래서 새로 나온 양식에서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호스피스 등의 구체적 항목을 적시해 상황에 따른 치료 여부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만약 여기에 전부 “아니오”라고 썼다면 그 사람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썼을까요?
막연히 연명을 위한 치료는 싫고 내용도 잘 모르겠으니까 모두 ‘아니오’라고 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든 치료를 원하니까 모두 ‘예’라고 하는 것일 뿐 의학지식으로 내용을 100% 이해하고 선택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양식을 썼더라도 응급상황이 오면 의사가 다시 물어보고 환자나 보호자의 의사에 따라 치료 방향을 정해 나가야 하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미리 알고 준비해야만 구체적 의사전달이 가능해져 환자가 원하는 죽음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의학적 상태에 맞춘 치료법, 치료결과 예측, 추가처치 등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알고 있어야 하므로 대화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제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 “치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치매는 이성적 판단이 어렵게 되고 일방적인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인데요,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나는 병원 안 간다, 요양원 안 간다, 입원 안 할 거야”, “내 맘대로 살 거니까 내버려 둬!”라고 하시지만 "누가 봐도 치매라면?" 병원에 안 가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의사존중일까요?
치매 환자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치매 환자가 되기 전 어떻게 치료받고 싶은지, 원하는 것을 어디까지 하고 싶은지, 어디에서 치료받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과 소통, 이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병원 치료 자체도 문제예요.
“무조건 병원 치료를 해야 한다, 병원에 가야 한다” 라는 경우도 병원 치료 자체가 절대 선(善)이 아니므로 어느 상황에서는 단순 연명으로 생존율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판단이 필요할 때 노인의학의 대가인 매리 티네티(Mary E. Tinetti) 교수가 제시한 노인건강을 평가하는 중요한 다섯 가지 M을 참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Mind (정신작용)
치매(dementia), 섬망(Delirium), 우울증(Depression) 등의 질병은 정신이 온전해야 독립적인 사고와 판단이 가능하고 삶 자체에 재미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Mobility (이동성)
“걸어 다닐 수 있는가? 설 수 있는가? 누워만 있는가? 용변처리 가능한가?” 이것는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질문이죠.
세 번째 Medication (약)
도움이 되는 약물을 처방하여 복용하고 있는지, 해가 될만한 약을 먹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네 번째 Multicomplextiy (다중복합성)
다양한 질환이 많은 노인일수록 그 질환들이 조합이 되어 합병증이 생기게 쉽기 때문에 신부전, 투석, 치매 같은 것들을 복합해서 바르게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What Matters Most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현재 가장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중요한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데요, 가족이나 의사들이 노인을 치료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많은 전문가가 강조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걱정을 멈출 것, 미래의 계획을 잘 세울 것, 유언을 쓰고 책상을 정리하고 도움을 기꺼이 받으며 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하고 맡길 것”
어떻게 죽을 것인지 이야기가 안 되어 있으면 노인들은 치료받고 돌봄받다가 일방적으로 죽어가게 되고 결국 “죽음에 환자 본인의 선택이 배제된다”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노인 혹은 노인준비생으로서 젊을 때부터 나이 듦을 주제로 공부하며 건강하게 사는 법을 다각도로 생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죽음을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덧붙여 병원과 의료계도 환자를 세심히 돌보고 그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환자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후 그에 따른 대처와 치료를 수행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직면했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웰-다잉(Well-dying)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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