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슬픔을 어루만지다

K숲 2023. 3. 15. 08:00

[신철규*시인]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신철규

 

인간은 피와 살, 영혼을 가진 매우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보고 느끼는 감각의 한계는 물론 외부의 영양분을 취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의 한계가 있고, 인식영역 역시 한계와 결함이 가득하며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슬픔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큰 슬픔 외에도 친구에게 바람맞았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었을 때 같은 사소한 좌절감에서 오는 일상의 슬픔도 많이 겪고 있는데요, 간단한 현실문제는 상황만 개선되면 완화되지만, 한계에 직면해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때는 커다란 슬픔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타인과 세계의 벽 앞에서 느끼는 깊은 무력감과 막막함이 우리를 슬픔의 수렁에 점점 더 깊이 가두는 것 같아요.

 

마음이 슬프면 당연히 몸도 아프게 되어, 가슴이 쪼개지고 명치가 조여오며 가슴을 벽돌로 누르고 있는 듯한 고통에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냥 누워있을 수밖에 없을 때도 많죠. “슬픔을 뜻하는 “sorrow”“sore(쓰린, 아린)”와 같은 어근을 가졌다는 것은 슬픔은 마음뿐 아니라 몸의 아픔까지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작은 자신의 존재에 비해 엄청나게 큰 존재로 느껴지는 세계에 대한 괴리감, 혹은 자신과 세상이 만나는 접점이 사라진 불일치의 감정으로 찾아오는 슬픔.

이러한 슬픔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찾으면서 문제적 감정이라 느낀다면, 슬픔의 발생과정 및 그 모든 감정에 대한 공감과 성찰을 전하는 에세이 슬픔의 위안(Ron Marasco & Brian Shuff)을 보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요, 책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바로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다른 이들도 당신이 느끼는 것을 느낀다.

당신의 감정이 삐딱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추하거나

전혀 당신답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당신이 덜 외롭다고 느끼게 하는 것,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바보 같다는 느낌을 덜 받게 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슬픔에 빠지는 사람들이 놓여지는 상태와 그것을 극복하는 실패의 과정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데요, 깊은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행복해 보이는 타인과 만났을 때 느끼는 소외감과 자신의 슬픈 감정이 타인을 불편하게 할 것 같아 일부러 피하는 회피 등의 사례도 많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보호막은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수용하지 않아 결국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게 되고 네가 내 슬픔을 알아?” “네가 나만큼 슬퍼?”라는 식의 극단적인 생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어두운 보호막이 오래 유지되면 결국 우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만 슬프다’ ‘나의 슬픔만이 중요하다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자기 슬픔을 객관화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슬픔과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슬픔을 특권화하여 자신의 슬픔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타인의 슬픔을 볼 수 있는 여유를 획득할 수 있어야 자기만의 깊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슬픔의 객관화
슬픔의 객관화

 

혼자 있고 싶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몸이 상당히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요, “비탄, 큰 슬픔을 의미하는 “grief”와 맥을 같이하는 중세 단어 “gref”무겁다라는 뜻을 가진 것을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큰 슬픔은 자연스럽게 무게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슬픔의 무게 자체가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에 엎드려 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신철규 시 <눈물의 중력> )는 시구를 만들기도 했는데요, 결국 오래된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슬픔의 무게를 스스로 직시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시간과 심리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지난 몇 년간 사회적 슬픔(세월호 참사, 해고 노동자, 불평등과 부조리 등)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정말 슬펐던 진짜 이유는 사태 자체의 비극보다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각에 빠진 세상에 대한 비탄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부조리를 덮으려는 자들이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을 그게 뭐?”, “그 정도로 왜 그래?” “그 정도 슬픔은 다 있는 것 아니야?”라며 먹고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비난을 퍼부은 것처럼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그들의 말에 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슬픔을 억누르거나 슬픔을 무시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그들과 자신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방법은 아마도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심혹은 “(양심의) 가책으로 번역되는 “conscience”= con(함께, 같이) + scientia(알다, 보다)의 합성어인데요,양심이란 함께 보는 것, 함께 알려고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은 우리를 상당히 불편하게 합니다.

타인의 슬픔을 함께 보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을 공감이라고 하는데, 일상의 바쁜 시간을 쪼개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시간을 희생해 편치 않은 마음을 떠안는 일이어서 당연히 마음도 매우 힘들게 되죠.

그렇다고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을 차단해 버린다면 우리는 작고 의미 없는 테두리에 갇힌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시인은 슬픔과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천국에 이르지 못해 마지막까지 남은 단 한 사람, 지금도 슬픔에 빠진 그 존재를 천국의 문턱에서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것, 시(詩)!

슬픔은 기계의 오작동이나 병에 걸린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양심을 가진 인간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귀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무게를 직시하고 그 슬픔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슬픔의 웅덩이에서 밖으로  한 발짝내디딜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너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신철규 <눈물의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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